다웟이 전한 복음

주전 1,000년 경 팔레스타인 땅의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지난 수 세기 동안 견원지간이었던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군대가 진을 쳤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그 승패가 보나마나였다(중국의 순자는 이런 걸 두고 “이란격석”이라 했던가). 블레셋은 최신식의 철제무기와 훈련된 군대를 보유했지만, 이스라엘은 그저 농사 짓다 불려나온 병사들이 목재, 석재, 청동 무기만을 들고 있었다. 더욱이 지난 40일 간 조석으로 골짜기에 나타나 이스라엘 군대와 야훼를 온갖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저주하던 장수가 있었다. 키가 9′ 9”, 무려 3미터다(“성경이 또 허풍을 떨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17세기 영국에 John Middleton이란 사람은 신장이 9′ 3″였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게다가 그는 이집트, 에게해, 아나톨리아, 시리아 등지에서 직수입한 최첨단 군사장비로 온 몸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블레셋 가드 출신 골리앗은 그 존재 자체가 공포였다.

엘라 골짜기로부터 강바닥이 말라버린 와디를 거쳐 텁텁한 흙먼지 바람이 불어온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적수 골리앗에 대응할 이스라엘의 대표가 40일 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아직도 앳된 10대의 양치기 소년 다윗이다. 얼굴에 홍조를 띤 그는 골리앗을 단 한 방의 물매돌로 쓰러트린다. 블레셋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이스라엘은 수 천 년간 인구에 회자되는 위대한 승리를 얻게 된다. 호주의 신학자 존 우드하우스는 이를 두고 “다윗이 전한 복음”이라는 강렬한 제목을 붙였다. 출정을 만류하는 사울 왕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나가서 대신 싸우겠습니다(삼상17:32).” 수 백년 전 홍해와 이집트 추격군 사이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출14:13-14).”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목자들은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무서워하지 말라…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눅2:10-11).” 이스라엘에 임한 구원의 메시지는 “1) 두려워하지 말라, 2) 야훼가 대신 싸울(또는 그리스도가 대신 죽을) 것이다”였다.

사단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마치 예견이라도 하는 듯한 이야기, 언약백성에 대한 압제를 꺾은 다윗의 축소판 복음을 1주일 내내 묵상하며 가슴이 뛰었다. 이번 주일에 할 설교의 내용을 모두 정리해 놓고 기쁨과 감사로 다시금 찬찬히 본문을 묵상하며 읽어 가다가, 뜻밖의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가슴이 무너졌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니라(삼상17:11).” 아, 그렇다. 이 이야기가 복음에 견주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승리이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그것이 “자격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에 복음인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키가 크고, 왕이며, 기름부으심까지 경험했던 사울 왕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40일 간 이런 모욕을 당하다 보면 백성들 가운데서도 한 두 명 쯤은 나설 법도 한데, 이스라엘은 집단적으로 마비와 도피, 불신앙의 상태에 있다. 이들은 단언컨대 이런 승리를 맛볼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이 복음인 것은 그 승리가 너무나도 확실하여 내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의 은혜가 나를 불가항력적으로 압도했기 때문이다. 복음은 바로 이런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이래야 한다.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니 너는 들어라” 식의 고압적인 자세는 이제 신물이 난다. 자격이 없는 죄인인 우리가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역시 겸손하게 그 복음을 나눠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런 독선적인 태도를 고집한다면 이는 복음의 내용을 비복음의 외장에 담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