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王政)의 탄생: 남들처럼 산다?

사무엘상을 강해하며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정의 탄생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에게

왕정이란 단어는 다소 부정적으로 들린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천명했던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대표하는 유럽의 절대왕정은 부르주아 시민혁명을 통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아니면 최소한 영국의 입헌군주제처럼 길들여지고 제도화됐다. 인과

의를 기반으로 했던 동양의 군주정치 역시 그 표현과 수사가 이토록 적나라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전제적이고 폭압적이었다. 우리의 가슴 아린 근현대사를 되돌아 보면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외세에 주권을 빼앗기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긴 왕도정치를

마감하고 말았다.

하지만 3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이란 정치적 혁신이며 사회적 진보에

다름 아니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그 때까지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며,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일으켜

위기를 모면케 하셨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나라들은 왕을 갖고 있었다. 왕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충성하는 관료체제를 통해 대단히 효율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고 상비군을 통해

자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12지파가 느슨한 부족동맹을 이루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후진적인 국가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왕정이 초래하게 될 수탈과 억압을 엄중히 경고하시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다. 그가 항복한 걸까?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지만 중요한 단서가 달려 있다. 그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백성을

“다스리라”고 사무엘에게 명하신다(삼상9:16-17).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왕(Melek)이란

단어를 피하시고 지도자(Nagid)란 말을 쓰신다. 이 지도자는 부족동맹 시절에 군대를

이끌던 지휘관을 의미하는 단어다. 훗날 왕조가 열린 이후에도 이 단어는 왕이 아니라

왕세자를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요는, 그는 누군가의 밑에 있는 자다. 한편

다스리다(Asar)란 말도 사실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원래의 의미는 규제, 억제,

감금하다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도자는 실은 하나님의 권위 밑에서

일하는 대리통치자이며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한 백성들의 “남들

같고자”하는 욕망을 억제하고 규제하는 것이 그의 임무인 것이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본질상 "거룩"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레19:2).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도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지난한 몸부림이 아니겠는가?

헌데 거룩의 반대말은 무얼까? 초등학교 국어 숙제처럼 반대말을 나열해 보면 비속함,

불결함, 천박함, 상스러움, 음란함, 저열함, 추악함, 이만하면 사전에 나올 만한 반대말은

모조리 나열한 듯 한데.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거룩함의 반대말은 평범함이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You must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레10:10).” 신앙인은 남다르게 살 것을 요청 받는다. 기독교가 심한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은 어쩌면 남다르게 사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님도

제자가 되기 위해선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다(눅9:23).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 “제자도의 대가”를 자신의 생명으로 지불하고야 만다. 그

정도로 드라마틱하지는 않더라도, 남이 밟지 않는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이 신앙의

정도(正道)가 되는 유쾌한 역설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 더 많이 넘쳐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