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사무엘상22:1-2)”

초등학교 5,6학년 형석이는 비극적인 유럽 문학에 심취되어 밤을 패며 그 허구의

세계(그것이 현실이 아니기에 더욱 친근하고 따사로웠는지도 모를 일이지요)에 탐닉하던

징그러울 정도로 조숙한 아이였습니다. 시베리아의 매몰찬 바람처럼 폐부까지 날카롭게

파고드는 침울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의 국민주의 음악이 두 번째의 도피처였던 형석이는

틴에이저가 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이미 죽음이라는 것을 놓고 유희를 벌이는

자살충동이 강한 아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험스럽기 그지 없는 12살 아이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셨지요. 그 무엇으로도 비견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은혜로

나를 완전히 압도하신 그 분…

많은 사람들이 38살 적지 않은 나이에, 그것도 소위 미국의 최고 명문대학에서

박사과정 멀쩡히 밟다가 돌연 신학교에 가서 사역자가 된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따지듯이

묻곤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는 너무 많이 들어본 다소 식상한

이야기고, “이 곳에서 해야 할 사명을 주셔서”는 좀 오글거리는 자기포장인 거 같고…

하지만 저의 삶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저를 다루어 오신 과정들을 되돌아 볼 때,

명징하게 드러나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있습니다. 고통과 상처와 아픔은

예부터 저의 벗이었고, 그에 대한 민감한 자기인식은 제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래서 저를 부르셨나 봅니다.

8년 간 전도사로 목사로 베이지역을 섬기며 유독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이 풍요로운

땅에, 교회가 이토록 많고 재원이 넘쳐나는 이 곳에, 프로그램이 셀 수 없이 많고 교회의

사역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 곳에, 정작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서 또는

리더들에게서 받은 상처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고, 자조 섞인 헛헛한 말투로 스스로를

“가나안” 성도라고 칭하고 있고, 아니면 공동체가 전혀 없는 미국 교회로 스며들어

“익명의 섬”으로 살기를 선택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2015년 11월 예담교회를 개척하면서 제가 드린 기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

저희 교회에 이런 은사가 있고, 이런 자원이 있고,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내주세요”가 아니라, “주님 제가 아니면 돌볼 사람이 없는 그런 영혼들을

보내주십시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구령(救靈)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러나 상처 받고 눈물 흘리고 있는 존귀한 주의

백성들을 섬기고 돌보는 것도 역시 구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최소한 조령(助靈)은 될

터이지요. 저는 이것부터 시작할 셈입니다. 어떻게 하냐고요? 뭐 특별한 트릭이나

휘황찬란한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닙니다. 뼈를 깎아 준비한 강해설교(제 불문율은 1분

설교를 위해 1시간 연구입니다), 그저 소박하지만 순도 높은 예배, 그리고 상처를 싸매는

따뜻한 목양 사역, 제가 갖고 있는 건 이것이 전부입니다. 저도 압니다. 이렇게 신문에

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하지만 또 압니다. 제가 부족한 그 만큼을 우리 주님께서

채우셔서 그 분의 위대하심과 백성들을 향한 긍휼하심을 반드시 보이시고야 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