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미치광이라도 살아 있으라

가드 왕 아기스, 그를 시립(侍立)하고 둘러선 블레셋의 신료들, 그리고 이

적국의 궁정에 발을 들여놓은 다윗(삼상 21). 그런데 설마? 그는 블레셋 척후병에게

발각되어 압송되어 온 것이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는 가드 출신 골리앗을 죽이면서 혜성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수 많은 블레셋 병사를 죽였다. 더구나 그는 골리앗이 지녔던 칼을 차고 나타났으니

이쯤 되면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 아닌지? 아니면 사울에 쫓겨 궁지에 몰린 나머지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건 아닌지? 하지만 고대 세계의 정치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무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황당무계한 악수만은 아니다. 그는 망명 신청을

하려는 것이다. 이를 허락한다면 이스라엘의 명장이 오히려 블레셋의 용병이 될 수도

있으니 가드 왕으로서는 제법 실속을 챙길 수 있을 터였다.

다윗이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신하들의 살기가 등등했던

것이다. 망명 의사를 꺼내보기도 전에 목이 달아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순간 그는

문에 끄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려대며 미치광이 행세를 했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아닌가? 고대인들은 정신이상자는 신의 노여움으로 저주를 입은 자들이라 여겨

죽이거나 상하게 하지 않았다.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고 가드에서 쫓겨났다. 휴,

살았구나 하고 그저 안도할 만한 일인가? 야훼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의분에

떨쳐 일어나 자기 키 두 배의 거인을 때려잡은 다윗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선택되어 기름부음을 받은 구약의 메시아, 그런 그가 살기 위해 이토록 비천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미래의 왕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궁극적인 메시아 예수의

조상이 될 다윗, 그는 오늘 모진 목숨을 연명키 위해 고대인들이 죽은 개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미치광이의 모습을 처절하게 열연하고야 만다. 과연 이 광경을 보시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4 세기가 지나서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선택하셨는지를 동서고금 어떤 문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절절한 비유로 말씀하신다. 야훼가 선택한 이스라엘은 태어나자 마자 탯줄도

제대로 자르지 않고 씻기지도 않고 강보에 싸지도 않은 채 들판에 내버려진 여자

아이였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겔16: 6).” 남의 나라에 400년이나 빌붙어 노예로 살던 민족, 애굽

왕이 태어나는 남아들을 다 죽이라고 명해도 찍소리 못하던 졸렬한 백성, 그렇게

버려져서 발버둥치던 이스라엘에게 애절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는 너를 제사장

백성으로 삼을 것이고, 너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뤄갈 터이니,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윗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너는 미치광이라도 살아 있으라. 내가

너를 통해 위대한 왕가를 이룰 것이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며, 네 씨를 통해 온

인류를 구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미치광이라도 살아 있으라.” 그런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은 3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음을 나는 믿는다. 우리가 더 이상 추락할

길이 없는 나락을 헤맬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만 할 때,

인생의 비루함이 필설로 담을 길 없이 우리를 옥죄어 올 때, 피투성이가 되어 발버둥

칠 때,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광기(狂氣)에 가까운 저항을 할 때, 우리는 그 옛날

이스라엘에게, 다윗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애타게 말씀하시는 야훼의 음성을

들을 일이다. “피투성이라도, 미치광이라도 살아 있으라.”